영천 충효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81호
충효재는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 정환직(鄭煥直)과 정용기(鄭鏞基) 부자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한 재사(齋舍)로,
1905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영천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정환직과 정용기 부자의 충효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네 이름을 검단동에서 충효동으로 고쳐 1923년에 건립하였다.
정환직(1843~1907)은 고종 25년(1888) 의금부 의금도사를 지냈으며 광무 3년(1899) 시찰사, 도찰사겸 도포사를 역임하고 그 뒤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그의 아들 정용기(1862~1907)는 혜민원 총무를 거쳐 민영환 등과 함께 독립회와 만민회에 참여하고 보안회 국채보상운동에 회장으로서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광무 9년(1905) 불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관직을 사직한 뒤, 1907년 10월 7일 아들(정용기)이 죽장면 입암에서 영천 수비대소속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적군의 총탄에 의하여 순절하자, 아버지(정환직)가 다시 의병장에 올라 국민들의 반일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다 결국 잡혀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산남의진(山南義陣)
1906년 3월 영천에서 조직한 의병 부대로
중추원 의관 정환직(鄭煥直)이 광무(고종) 황제로부터 의병 봉기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 부대이다. 초기에 정용기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1906년 9월 그의 석방을 계기로 의병진을 재편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신돌석(申乭石) 등 인근의 의병들과 연합작전을 벌이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의병진은 대장 정용기 이하 참모진이 전사하였다. 그 후에도 산남의진은 정환직과 최세윤(崔世允)을 중심으로 1908년까지 경북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경과]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밀지 [華泉之水]를 받은 정환직은 아들 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1906년 3월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규합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했다.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를 중심으로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이종곤, 선봉장 홍구섭, 후군장 서종락, 좌영장 이경구, 우영장 김태언, 연습장 이규필, 도포장 백남신 등이 포진되었다.
산남의진은 영해 지방의 신돌석 의병부대를 후원하고자 북으로 진군하던 중, 경주 우각(牛角)에서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간계로 정용기가 체포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중군장 이한구가 지휘하였으나 7월 하순 경 해산하고 말았다.
1906년 9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죽장·포항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초 영일군 죽장의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와 장령 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의병진은 괴멸하고 말았다.
그 후 정환직이 아들을 대신하여 대장이 되어 의병진을 이끌었으나 일본군의 추격과 단약 및 식량의 부족으로 해산하였고, 대장 정환직은 1907년 12월 청하에서 체포되어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최세윤(崔世允)이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대장에 취임한 후 산남의진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1908년 7월까지 유격 활동을 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짐망화천지수전세비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 이는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써, 정환직으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져 있었고 이에 정환직을 을사조약 직후 12월 5일 바로 관직을 사퇴하고 아들 정용기와 함께 계획을 수립하여 먼저 영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그 결과 산남의 진이 조직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