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리 오층석탑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의 직접 교역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을 통해 중국과의 교통로가 개척됨에 따라 고대 불교 문화는 빠른 속도로 유입되어 발전하였으며 지금도 그 증거물들이 당시 중국과의 교통로에 위치한 지역에 남아 있다.
당시 수도인 경주에서 무역항이었던 경기도 남양만의 당은포에 이르는 교통로는 두 가지의 경로가 있었다.
경주-건천-영천-대구-선산-상주-함창-계림령-충주-여주-이천-당은포의 길과, 경주-영천-대구-군위-의성-안동-영주-죽령-단양-충주-여주-이천-당은포의 길이다. 첫 번째 길은 대구 팔공산의 남쪽을 지나는 길이며, 두 번째 길은 신라 동북방의 길이다. 그런데 적어도 신라가 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첫 번째 교역로보다 두 번째 동북방 교역로가 주로 이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교역로는 당시 백제와 치열한 전투 상황임을 고려할 때 많은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인은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더 안전한 두 번째 교역로를 주로 이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교역로와 인접한 경북 지역 곳곳의 고신라 유물과 유적이다.
6세기 이전에는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중국의 선진 문물에 수동적이었던 신라가 이후 한강 유역을 점령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문화 수용을 원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신라인들은 고대 교통로 확보에 노력하였고, 그 길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안동, 영주, 봉화 등지에 서로 시기를 달리하는 다수의 고신라 불상이 남아 있는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 따라 성립된 기념비적인 탑이 의성 탑리 오층모전석탑이다. (한국 미의 재발견-탑,솔출판사)
▲의성 탑리오층석탑
신라, 7세기 말, 현재 높이 9.6m, 국보 제77호, 경북 의성군 금성리 탑리동. 기단은 석탑식, 탑신의 기둥은 목탑식, 지붕의 구조는 전탑식의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어 신라 석탑의 원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탑이다.
▲기단부
8세기에 성행하는 전형적인 결구식 기단부가 이 탑에서 비로소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