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림사(鳳林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1742년(영조 18)에 징월(澄月)이 창건했으며 이 때 인근 보현산에 있던 법화사(法華寺)를 옮겨왔다. 법화사는 신라 문무왕(재위:661∼681) 때 의상(義湘)이 창건한 사찰이다. 1857년(철종 8) 소월(韶月)이 중창한 바 있다. 현재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으며,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는 삼존불상과 후불탱화·신중탱화·지장탱화·칠성탱화 등의 탱화가 남아 있다.
사찰을 옮겨온 설화가 전한다. 법화사의 한 사미승이 탁발을 나갔다가 병이 들었다. 그는 절에 돌아오지 못하고 민가에서 요양하였다. 사람들은 사미승을 극진히 보살폈는데, 여름이 되자 개고기가 몸을 회복하는 데 좋다며 먹으라고 권하였다.
사미승은 고민 끝에 개고기를 먹고 병이 나아 칠월 칠석이 되자 절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번개와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밤새 내리더니 다음 날에 승려 1명이 사라졌다.
그후 매년 칠월 칠석이면 어김없이 밤마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다음 날에 승려 1명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급기야 주지가 회의를 열고 칠석날 모든 승려의 몸에 실을 꽂아서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아보자고 하였다. 다음 날 역시 한 승려가 사라졌는데, 실을 따라가 보니 산중턱 바위굴 속에 큰 지네가 잠을 자고 있었고, 이 화를 피하고자 절을 옮겼다고 한다.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보물 제1612호
1724년에 신녕현(新寧縣) 보현산(普賢山) 법화사(法華寺)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 현재 영천 봉림사에 소장되어 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이 인도의 기사굴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불화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많은 성중이 둘러싸고 설법을 듣는 장면은 조선시대 유행한 영산회상도 중에서도 짜임새 있는 구성과 대화면의 장중한 표현으로 단연 독보적인 작품성을 보여준다. 봉림사 영산회상도는 적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원색조의 안료를 사용하여 밝고 경쾌한 화면이 특징적이다.
화기에 의하면 봉림사 영산회상도의 조성은 3인의 대시주자에 의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시주자는 불굴사(佛屈寺) 종밀(宗密)로 바탕과 불사에 수요되는 공양(供養)을 시주했으며 최후종(崔厚種)은 채색 안료를, 당시 법화사 승려였던 신오(信悟)는 배접에 사용할 종이를 시주하였다.
제작에 관련한 더 상세한 정보는 불화와 함께 발견된 복장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복장물은 발원 내용을 수록한 발원문(發願文) 1매와 당시 사찰 소속 승려들을 기록한 본사질(本寺秩) 2매, 시주에 참여한 명단인 시주질(施主秩) 1매, 그리고 목조 후령통과 복장주머니[腹藏囊]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림사 영산회상도는 18세기 경북지역에 있어 의균 이후 팔공산화파의 불화 제작과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영산회상도는 본존불 뒤 후불탱으로 모셔져 있으며, 복장 유물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퍼 왔습니다.
▲수미단에는 팔상도를 조작해 넣었습니다.
▲우요삼잡을 위한 행도의 공간이 남아 있다.(최근에는 이런 공간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법당 뒷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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