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탐방/포항지역

[시내권]용흥동 신라 소재상 부인 순절비

해목령 2014. 4. 28. 23:14

신라 소재상 부인 순절비
소재지: 포항시 북구 용흥동

 

(안내문 중에서) 이 비는 통일신라 말기 소재상랑(蘇宰相郞) 부인의 절개를 기념하는 순절비(殉節碑)이다.
정치와 사회가 문란할 때, 조정에 소랑(蘇郞)이라는 덕망이 높고 청렴 결백한 대신이 있었다.
그의 부인은 절세의 미인으로 서울 서라벌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임금은 소랑 부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자 마음이 끌려 범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임금은 일부러 소랑을 일본 통신사로 임명하여 보낸 후 부인을 수차례 유혹하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자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타 지방으로 추방하여 버렸다.
그 부인은 소랑이 타던 말과 개를 데리고 일본에 오고가는 배를 잘 살필 수 있는 연화봉(蓮花峯) 정상에 움막을 짓고
남편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소랑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뱃 길에서 폭풍우를 만나 바다에 빠져
죽었으나 그 부인은 정절(貞節)을 지키며 대쪽같이 살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 소랑 부인의 혼백을 위해 사람들은 망부사(望夫祠)를 지어 유혼을 위로 하였으며,
고려시대 흥해군수가 이 연화봉에 올라 그의 혼을 위한 시를 지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조선 세조때 한 암행어사가 그 넋을 위해서 읊은 시 한수를 소개한다.

 

顒望臨碧空 멀리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怨情感離別 이별한 낭군만 그리워 할세
江草不知愁 강가의 푸른 솔이 야속하구나
巖花相爭發 바위에 붉은 꽃은 다투어 피어나건만
雲山萬里隔 산과 구름이 만리길을 막아
音信千里絶 님의 소식이 영영 끊어졌도다
春去秋復來 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오건만
相思幾時歌 아니오는 님생각 언제 풀건고

 

(의견)
용흥동과 대련리를 잇는 고갯길 연화재 마루에 세워져 있으며,
최근 포항-대구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많아져
오고가며 관심있는 이들의 발길이 잦다.

 

 

 

 

 

소랑(蘇郞) 부부에 얽힌 슬픈 설화

포항 북구 연화봉의 슬픈이야기

 

포항시 북구 용흥1동에 있는 우방타운에서 기계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연화봉(蓮花峰)이라 한다.

이 봉우리는 북구 신광면의 진산인 비학산의 줄기가 동남쪽으로 이어져 온 곳으로, 신라시대부터 명산이라 알려져 있다. 

그 시절 이 지역의 가뭄이 극심해지면 연일현감이 농민들과 함께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연화봉은 속칭 연화재, 솔개재라 하고 또 연꽃봉이라 하는데, 망부산(望夫山)이라는 이름도 있다. 망부(望夫)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관련돼 있어 이 같은 이름이 붙은 것이다.

 

때는 신라 말엽, 후삼국의 치열한 각축전이 전개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당시 신라 조정은 부패와 무능이 극에 이르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최치원은 『계림황엽(鷄林黃葉)』이라는 표현으로 신라의 위기와 붕괴를 경고 했을 지경 이었다.

이러한 신라 조정에 소랑(蘇郞)이라는 청렴결백하고 충성스런 신하가 있었다. 그는 전쟁터에서는 용맹한 장수였고, 조정에서는 덕망이 높은 대신 이었다. 소랑 에게 부인이 있었는데, 마음가짐이 정숙하고 외모 또한 빼어나 장안의 선녀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의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는 소랑의 부인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욕망을 품게 되었다. 임금은 궁리 끝에 소랑에게 그의 집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였다, 소랑은 크나 큰 영광으로 받아 들이고 미복차림으로 방문한 임금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임금은 술에 취해서 소랑 부인의 자태를 보자 그만 사련(邪戀)을 품게 되었다. 그 순간 이후로 임금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계획 세우기에 골몰했다. 마침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신라 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돌아 갔는데, 그 답례로 일본에 파견할 통신사를 선임해야 했다. 임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소랑을 파견했다. 그 후 임금은 소랑의 부인을 수 차례 궁중으로 불러들여 갖은 협박과 감언이설로 그를 회유했다. 그러나 소랑 부인은 완강하게 버티며 정조를 지켰다. 임금은 크게 분노하여 소랑의 재산을 몰수하고 부인을 먼 곳으로 추방했다.

소랑 부인은 소랑이 타던 말과 개 그리고 가복(家僕) 한 사람을 데리고 여기저기 방랑하다가 동해가 잘 보이는 연화봉에 올라가 움막을 짓고 쪽빛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이 돌아오는 배를 기다렸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더 가혹한 시련이 몰아쳤다. 남편이 귀국의 뱃길에서 폭풍우를 만나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 소식을 알길 없는 소랑 부인은 남편은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만 병이 들어 남편의 뒤를 따랐고 말과 개도 사방을 헤매다가 굶어 죽고 말았다.

그 애닯은 이야기가 퍼지자 이 지방 백성들은 소랑 부인의 장례를 후히 치르고 말과 개의 무덤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의 혼백을 기리기 위해 삼간초옥을 지어 망부사(望夫祠)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천 여년이 지난 지금, 연화봉에는 아스팔트가 시원하게 깔려있고 문헌에 전하는 명산의 자취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산천은 변해도 그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아득한 후손들은 「신라소재상부인순절비(新羅蘇宰相夫人殉節碑)」를 이 산 귀퉁이에 지어 소랑 부인의 슬픈 사랑과 절개를 기리고 있다.<열린포항/김도형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