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읍]충비 단량비(忠婢 丹良碑)
충비(忠婢) 단량(丹良)
남구 구룡포읍 성동3리 뇌성산(마을 주민들은 봉화산이라 부르기도 함)자락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광남서원(廣南書院).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여느 서원들과 별반 차이도 없는 평범한 서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예사롭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것이 있다.
이곳에는 조선초 계유정난의 피바람이 회오리치던 날 밤의 역사적 잔흔을 5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가슴에 고이 품어 온 잔잔한 감동의 사연이 배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충비 단량, 바로 그녀의 숭고한 충절 이야기다.
충비단량.
그녀의 아름답고 숭고한 넋이 잠들어 있는 그 역사속 현장으로 가보자.
때는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던 조선조 단종 1년 즉, 1453년 10월. 단량은 조선조 세종과 문종때 영의정을 지낸 황보 인(皇甫 仁)의 여종이었던 단량은 단종 1년(1453년)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 1453년 10월 10일 밤에 영의정 황보 인을 살해하자 화가 가문에 미칠 것을 예측하고, 황보 가문의 멸문지화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영의정 황보 인의 손자 황보 단을 물동이에 숨겨 머리에 이고 험난한 태백준력을 넘어 황보 인의 사위가 살고 있는 경북 봉화군 상운면 닥실리까지 팔백여 리 길을 걸어서 피신해 온 후 노자를 얻어 무작정 도망을 치다가 동해안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바로 대보면 짚신골이라고 전해진다.
이곳까지 도망쳐 온 단량(丹良)은 황보 단을 친자식처럼 키워서 성인이 되자 조상에 대한 내력을 일러 주었다 한다. 그 후 황보 단의 증손 황보 억이 구룡포읍 성동리로 이거해 와 세거지(世居地)를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황보 가문은 충비 단량의 도움으로 가문의 멸문지화를 막고 4대가 숨어살다가 290년만인 숙종때에 와서 누명을 풀려 황보 인과 그의 두 아들 황보 석, 황보 흠은 관적을 회복했고, 황보인은 영조로부터 추정공이라는 시호를 하사 받았으며, 정조 15년(1791년)에 뜻있는 지방의 선비들이 황보 인과 그의 두 아들 황보 석, 황보 흠을 제사 지내기 위해 광남서원을 세웠다.
이처럼 숭고하면서도 아름다운 충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충비 단량의 비는 황보 인의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구하고 키워내어, 가문의 멸문지화를 막은 단량에 대한 고마음을 기리고 그 고귀한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황보 가문의 후손들이 광남서원의 뜰에 세워놓았다.
조선시대 천한 노비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 놓은 이 비(碑)가 우리고장에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또한 문화재의 보존 가치를 넘어 교훈적 가치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따뜻한 봄날에 어린 자녀들과 손을 잡고 가족이 함께 찾는다면 자녀의 현장 체험 교육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열린포항 2004 봄호 발췌